[번역] 우리의 치명적인 내러티브 중독 : 클리앙

우리의 치명적인 내러티브 중독 (앨리스 롭)

한때,번역우리의치명적인내러티브중독클리앙 이야기들은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피터 브룩스는 주장한다 - 이제 그것들은 현실을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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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 롭 Alice Robb 은 과학 저술가이다. 그녀의 첫 번째 책인 <왜 우리는 꿈을 꾸는가 Why We Dream> 는 꿈의 과학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뉴 스테이츠먼에 정기적으로 서평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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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뉴 스테이츠먼 / 2022년 12월 16일
https://www.newstatesman.com/culture/books/book-of-the-day/2022/12/seduced-by-story-the-use-and-abuse-of-narrative-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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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문학 이론가인 피터 브룩스 Peter Brooks 는 당시 유행하지 않았던 주장을 옹호함으로써 이름을 알렸다: 우리는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자신들을 이해한다. 그는 1984년 그의 획기적인 저서인 <플롯을 따라 읽기 Reading for the Plot> 에서 내러티브는 "주요 편제 동력 principal ordering force" 이라고 썼다. 우리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우리의 삶에서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브룩스는 정치인과 의사에서 심리학자, 마케터 및 소셜 미디어 사용자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세계가 얼마나 완전히 동의하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다. 현재 84세인 그 비교문학 교수는 그가 일종의 내 탓이로소이다 mea culpa 로 프레임하는 자신의 새 저서인 <이야기에 유혹당하다: 내러티브의 사용과 남용 Seduced by Story: The Use and Abuse of Narrative> 에서 "우리가 21세기 초에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종류의 현실의 내러티브적 인수를 상상해본 적도 희망해 본 적도 없다"고 쓴다. 오늘날, 그는 야심찬 젊은 기업가들과 무방부제 퍼스널 케어 제품을 찾는 이상주의적 가족들의 얘기들을 접하지 않고는 비스킷 상자를 보거나 온라인으로 체취제거제를 검색할 수도 없다고 불평한다. 브룩스는 "내가 키운 새끼가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집어삼키는 포식자가 된 것 같았다"고 쓴다. 그는 TV를 켜자 조지 W. 부시가 그들 각자의 "독특한" 뒷이야기들을 공유하며 각료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을 때인 2000년 이래 이것에 마음을 졸여 왔다.

브룩스는 우리가 이야기에 너무 과포화되어 정보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가 그것을 전달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론이 더 적절할 때에도 우리가 분별력 없는 소비자들이 되어 플롯의 친숙한 리듬들에 너무 기꺼이 빠져들게 된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 우리의 지속적인 내러티브 노출은 우리를 음모 이론을 신뢰하기 쉽게 만들 수도 있다고 그는 쓴다.

18세기 소설들에서 작가들은 그들이 알려주고 있는 이야기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고심했다. 종종 버려진 여행 가방에서 원고나 편지 모음을 발견했다거나 위험한 고백을 익명으로 출판한다고 주장하는 정교한 서문을 포함시켰다. 항상 그럴듯하지는 않더라도 이 프레임 장치들은 적어도 독자가 작가와 이야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강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이 정당성을 얻음에 따라, 작가들은 자신들의 독자들을 허구의 세계로, 그리고 결국은 허구적 의식으로 직접 끌어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와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 와 같은 20세기 모더니스트 작가들은 신뢰할 수 없는 내레이터들을 등장시키고 "숨바꼭질 게임들에 독자"를 연루시킴으로써 인식론의 문제들을 최전선에 두었다.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Absalom, Absalom !>에서 드라마는 어떻게 정보가 풀리는지에 중점을 둔다. 왜 헨리 서트펜 Henry Sutpen 이 여동생의 약혼자를 죽였는가라는 중심 미스터리는 인물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의미의 다양한 층들을 갖게 된다. 그 인물들이 그 가족지(誌) family lore 를 각자의 관점에서 진술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내레이터와 작가, 이야기를 전하는 자와 이야기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알아내려고 애쓰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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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지아 울프
https://www.newstatesman.com/tag/virginia-wo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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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브룩스는 폴라 호킨스 Paula Hawkins 의 2015년 소설 <기차를 탄 여인 The Girl on the Train> 의 성공으로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 이 심리 스릴러는 부룩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한 인물이 자신의 죽음 경험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게 함으로써 그것 자신의 규칙들을 위반한다. 브룩스는 독자들이 소설의 모든 "엉성함"을 포용하는 것이 우리가 이야기에 몰두함으로써 생기는 게으름의 증상이라고 걱정한다.

우리는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러티브 렌즈들을 우리 자신들에게 돌리고 우리 자신의 삶들의 사건들을 플롯 포인트들로, 한 주인공의 여정의 구성 요소들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17살에 내 삶의 사실들을 대학 입학 위원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정리하라, 나의 방과 후 활동들과 고등학교 코스들 선택들에서 어떤 직통선을 찾아내고 내 자신을 공감적 성격으로 바꾸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거의 모르고 있었다. 나는 물리학이나 기하학에서 배운 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의 첫 번째 셀프 브랜딩 연습은 더 적절한 레슨 중 하나로 판명되었다 - 인스타그램에 내 삶에 대한 "이야기들"를 게시하고 (브룩스가 그것의 확산에서 "지배적 내러티브 패러다임"에 대한 더 많은 증거를 발견하는 장르에 기여하면서) 결국에는 회고록을 쓰는 것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나는 작가라는 변명을 가지고 있다. 슬레이트 Slate 의 디코더 링 Decoder Ring 팟캐스트 "스토리텔링 대유행 The Storytelling Craze" 에 따르면, 링크드인 LinkedIn 에서 "스토리텔러"로 식별되는 구직자의 수가 2011년 0명에서 2017년 5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한편 틱톡 TikTok 의 모든 이들은 "주인공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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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대유행
https://slate.com/podcasts/decoder-ring/2022/05/how-storytelling-became-a-product-and-where-it-goes-from-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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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룩스가 (키르케고르에 기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에 대한 무지로 인해 내레이터들로서 핸디캡을 안고 있다: 삶의 "의미가 명백해지는" 것은 죽음의 순간 전까지는 아니다. 오직 그때 - 보고를 거부하는 사건 - 에만 우리는 비로소 다양한 우여곡절들의 의의를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룩스에 따르면, 최종적 깨달음들과 후회들을 포함하여 허구적 인물들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은 새뮤얼 리처드슨 Samuel Richardson 의 <클라리사 Clarissa> 에서 발작 Balzac 의 <고리오 영감 Old Goriot> 및 톨스토이 Tolstoy 의 <이반 일리치 Ivan Ilyich> 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이 충동은 런던 교도소들에서 배포한 인기 있는 17세기 팜플렛들에서 더 조잡하게 표현되었는데, 그것들은 처형되기 며칠, 몇 시간 전의 범죄자들의 생각들을 포착했다고 주장했다. 교도소 사제에게 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술을 기초로 했는데, 그 고백들은 전형적으로 마지막 몇 분의 신앙 선언을 포함했다.)

브룩스가 "현실의 이야기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내러티브의 힘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는 단지 주의를 촉구할 뿐이다. 우리는 다루기 힘든 "현실의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이야기들을 필요로 한다고 그는 쓴다.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폐지하고 싶다고 해도 그는 승산이 없을 것이다: 이야기들을 만드는 것은 근본적, 직관적이다. 아이들은 단어들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허구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브룩스는 심리학자 폴 해리스 Paul Harris 의 말을 인용한다. 폴 해리스는 가공 make-believe 놀이가 유아들이 세상을 탐험하고 그들 자신의 상상 영역을 통제할 수 있게도 해주는 중요한 발달 단계라고 주장한다. 해리스는 그들이 자신들이 자라면 되게 될 소설 독자들과 TV 시청자들이 즐기는 것과 유사한 유형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브룩스가 왜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애호해서 서술 presentation 과 이해의 다른 형태들이 대체로 포기되었는지" 물을 때, 그가 논변 같은 논리적 모델들, 그리고 에코와 라임 rhyme 같은 서정시적 모델들을 언급했을 때까지는 내가 그 형태들이 어떤 것들일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이야기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증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광고주들은 현재 광고들에서 볼 수 있는 내러티브 아크들 arcs 이 아니라 가장 기억하기 쉬운 노래들 jingles 을 짓기 위해 경쟁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등 그가 제공하는 예들은 설득력이 있지만 나는 약간의 상술(詳述)을 원했다.

궁극적으로, 브룩스는 대안들을 제안하거나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까지 왔나 - 내러티브에 대한 학문적 주목의 증가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이야기를 올바르게 하는 것"의 치료적 가치에 대한 포스트-프로이트적 분석가들의 강조? - 에 대해 추측하는 데보다는 허구는 현실이 아니고 삶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이야기를 하는 것과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데 더 관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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