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클라스 루만(제텔카스텐 창안자) : 클리앙

읽기에 앞서

제텔카스텐(Zettelkasten),번역어떻게읽을것인가니클라스루만제텔카스텐창안자클리앙 영어로 쪽지 상자(slip box)라고 불리는 지식 관리 방법 혹은 도구를 설명하고 독려하는 글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가장 유명한 책은 숀케 아렌스(Sönke Ahrens)의 How to Take Smart Notes라는 책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 방법을 창안하고 가장 잘 활용했던 니클라스 루만 본인이 소개하는 글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아래 글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독일어로 쓴 Lesen Lernen(How to Learn Reading)의 영역본을 한글로 다시 옮긴 글입니다. 몇몇 문장은 독일어 원본의 기계 번역을 참고해 최종본에 반영했습니다. 글 중간에 나오는 것처럼 단어마다 똑같은 수고를 들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만 습관을 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을 발견해 여기에 더 많은 노력을 쏟고자 했습니다. 번역을 마쳤으니 이제 번역한 바를 메모 형태로 "압축적으로 재구성" 해야겠습니다. 많이 부족한 번역이기에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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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현대 사회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텍스트는 서로 다른 종류의 독서 방법을 필요로 한다. 때로 특정한 종류의 글에 특화된 독서 습관이 다른 유형의 독서를 방해하기도 한다. 글읽기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습관과 관련된 탓에 이런 특성화를 바로잡기는 쉽지 않다.

바로 학문적(wissenschaftliche) 글과 시, 이야기를 구분하도록 권장하는 이유다. 아래에서 주로 다루게 될 학문적 글의 고유한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은 우선 시나 소설과 차별화된 독서 방법이 필요한 이유와 방법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독자적 형식으로 존재하는 허구적 글은 17세기에서 18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역사적 과정의 결과물이다. 그 특징은 허구적 사실과 실제 사실을 구분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진짜라는 독자들의 확신을 얻기 위해 소설은 스스로를 어디선가 발견한 편지나 메모라고 제시한다) 이야기의 통일성은 긴장에서 비롯된다. 이는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가 끊임없이 떠올리(도록 만들)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장 폴(Jean Paul)이 말하는 또 다른 원인은 '되돌아보기(rückwärtsgerichtet)'인데, 갈등의 해소가 이미 읽은 부분으로 되돌아 갈 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마주하는 역설은 자신이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행위의 시간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읽은 부분'과 '아직 읽지 않은 부분'이 구별되는 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조화 되는 글 자체도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

시를 읽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항들이 요구된다. 시는 어찌 됐건 이야기를 운문 형식으로 전달하지 않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 한 줄 선형적인 방법으로 읽어 내려갈 수 없다. 이와 함께, 어조를 이루는 요소, 예외적인 단어의 선택(특히 일반적인 단어가 쓰일 경우), 반의어와 대조어의 식별, 특히 운율 등은 명백한 의미와 함께 지속적으로 심도 깊은(untersinnig) 일관성을 보장한다. 이런 종류의 '읽기'에는 주의를 요하는 단기 기억 능력과 함께 여러 층위로 '되돌아가기' 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며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말하기도 불가능하다.

학문적 글에서 요구하는 사항은 또 다르다. 여기서 상정하는 글은, 수학이나 논리적인 미적분의 비밀스런 언어가 아닌, 일상의 언어로 쓰인 글이다. 과학자들도 출판을 위해서 여전히 글을 써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하고 폭넓은 단어를 선택하게 된다. 학문적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이 과정에서 무작위성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작가들조차도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글에 담긴 구절 대부분은 다른 방식의 구성이 가능하며, 언제 작성하는가에 따라 다른 형식을 가진 글이 나온다. 문장 구성에서 중요성이 떨어지는 상당수의 단어는 개념 규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앞의 문장에서 "미치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이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의미상 매우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 단어의 차별성과 이해 가능성에 엄정한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는 글 전체(Textmasse)의 분량에 비해 매우 작은 부분이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런 결정적인 단어를 어떻게 찾아낼까?

특히 이런 문제가 빈번하게 나타나는 두 가지 사례가 바로 번역가와 초심자다. 어쨌든 나는 학문적 연계성을 유지하고 다듬는 일에 무척이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내 글쓰기가 우연한 환경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고 있는지 이 두 계층의 독자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번역가들은 주어진 글의 학문적 맥락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한 편의 글에서 자신이 발견한 모든 단어에 동일한 노력을 기울인다. '직역'이나 어순에 따르는 번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중요도가 낮은 수많은 단어를 자유롭게 구성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으리라 여긴다. 사전적으로 대치 가능한 수많은 단어 가운데 저자가 뜻한 바에 아마도 가장 가까이 있는 듯 보이는 하나의 단어를 선택한다. 이런 방법이라면 새로운 언어로 쓰인 완전히 다른 글 외에 어떤 다른 결과가 가능한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학문적 흥미를 가진 독자들은 가능하면 많은 언어를 배우라는 조언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수동적일지라도 최소한 다른 언어를 능숙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초심자, 특히 문장 형태로 정렬된 막대한 양의 단어를 마주하는 학생들은 문장 순서에 따라 읽어 내려 가며 문장을 따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 걸까? 무엇을 익혀야 하는 걸까?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부차적일까? 몇 쪽을 읽은 뒤에도 무엇을 읽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걸까?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다. 마르크스(Marx), 프로이트(Freud), 기든스(Giddens), 부르디외(Bourdieu) 등. 대부분의 지식을 이름 순서로 나열할 수 있음은 명백하며 사회 현상학, 문학 분야의 수용자 이론 등과 같은 이론들 또한 이름 순으로 나열할 수 있다. 사회학 개론서와 기초적인 글 또한 이런 방법을 따른다. 하지만 이런 작업으로는 개념적 연관 관계, 특히 글이 해결하려는 문제의 본질은 배울 수 없다. 그럼에도 공부의 막바지에 이르러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조차 막스 베버(Max Weber), 혹은 분량이 너무 많다면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를 주제로 시험을 치르고자 하며 이를 위해 각 저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보고서로 제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학문적 글읽기의 문제는 필수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반복되는 것과 새로운 것을 구분하기 위해 단기 기억 뿐 아니라 장기 기억을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암기일 뿐이다. 바꿔 말하면 매우 선별적인 독서가 필수이며 광범위하게 연결된 참조 문헌을 추려낼 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되돌아가기'(Rekursionen)의 개념 또한 반드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혹은 앞의 문장에서 "반드시"와 대비되는 "되돌아가기"의 예처럼, 예외적인 것들만 존재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발췌한 내용이 아니라 읽은 내용을 압축적으로 재구성한 메모일 것이다. 이미 설명된 내용을 다시 설명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틀(frames)', 즉 관찰의 도식에 주의를 기울이는 훈련으로 이어지며, 심지어 특정 상황에서 텍스트가 제시하는 설명이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설명이 무엇인지까지 알아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부분은 무엇이며, 주장에서 배제된 것은 무엇일까? '인권'을 다루는 글에서 저자가 빼놓은 부분은 무엇일까? 인간 외에 사물과 동물의 권리? 인간의 책무? 그도 아니라면 문화, 혹은 인권에 무지했으나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역사 시대와의 비교?

이로 인해 우리는 또 다른 질문에 이르게 된다. 바로 '무엇을 위해 쓰는가'이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처음 만들어 내는 대부분은 쓰레기다. 우리는 자신의 활동에서 쓸모 있는 무언가를 기대하도록 교육받아 왔기에 유용한 결과가 없는 듯 보이면 바로 자신감을 잃고 만다. 그렇기에 어떤 메모를 어떻게 정리할 지 되돌아봐야 추후에 여기에 다시 접근할 수 있다. 최소한 그럴 수 있다는 환상에 위안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번호를 매긴 색인 카드와 색인을 이용할 수 있는 카드 보관첩 혹은 컴퓨터가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 방식의 다음 단계는 지속적인 메모의 활용이다. 이는 시간을 요하는 활동이지만 단조로운 독서와 우연에 기댄 기억력 훈련을 넘어설 수 있다.

앞서 말한 글 유형의 세분화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음을 상기해 보자. 이는 학문적 글, (누군가는 멀티미디어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시, 그리고 근대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세분화의 모든 측면에 출판이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점이다. 특히 컴퓨터가 제공하는 가능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글쓰기 본연의 힘을 되돌아 봐야만 할지도 모른다.

니클라스 루만(영역, 만프레드 퀸(Manfred Kuehn))


영역본; https://luhmann.surge.sh/learning-how-to-read

독일어 원본; Luhmann, Niklas. “Lessen Lernen.” Schriften zu Kunst und Literatur, Shurkamp Verlag, 2008, pp. 9–13, https://www.geschkult.fu-berlin.de/e/khi/Personen/privatdoz/brevern/PDF2/Luhmann_Lesen_lerne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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