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은 형이상학적인가 세속적인가?번역인간의고통은형이상학적인가세속적인가클리앙 (드와이트 퍼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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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퍼로우 Dwight Furrow 는 샌디에고 메사 칼리지 철학과 교수이다. 그는 음식과 와인의 철학, 미학, 그리고 윤리학을 전문으로 한다. 퍼로우 교수는 음식과 와인 미학에 전념하는 블로그인 https://foodandwineaesthetics.com 의 발행인이자 저자이다. 그는 또한 Ethics: Key Concepts in Philosophy, Reviving the Left: The Need to Restore Liberal Values in America, Against Theory: Continental and Analytic Challenges in Moral Philosophy 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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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3Quarks Daily / 2023년 1월 23일
https://3quarksdaily.com/3quarksdaily/2023/01/is-human-suffering-metaphysical-or-munda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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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실존주의"라는 범주로 묶는 가장 저명한 저자들을 믿는다면,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고통은 허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인간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는 최선의 렌즈인지 궁금하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현대 생활에서 신의 역할이 후퇴하고 과학적으로 정보에 입각한 세속적 현실관으로 대체되면서 초월적인 도덕적 틀의 상실로 인해 우리는 도덕적 지침을 잃게 되었고 이것은 불안과 괴로움으로 이어졌다. 광대하고 무정한 우주에서의 인간적 관심의 소소함은 삶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인생에 궁극적인 목적은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개인적 의도들은 근거가 없다.
카뮈는 이렇게 썼다:
부조리는 인간의 필요와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 간의 이 대립에서 탄생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그래서 카뮈에게 인간의 고통은 시지프가 바위를 끝없이 산 위로 굴려 올리다가 다시 굴러 떨어지도록 선고받은 수고와 같다.
사르트르는 유신론적 세계관의 소멸은 이제 우리가 인간의 자유라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 직면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치는 없다. 대신 매 순간 우리는 사실들의 의의와 그것들과의 우리의 관계에 대해 선택한다. 삶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발명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되었으며 우리의 행동과 우리가 행동에 부여하는 의미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도덕적 틀이 없으면 제안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리는 귀결들을 알지 못한 채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고 우리를 괴로움과 절망에 빠뜨리는 선택들을 해야 한다. 사르트르는 일상적 대상들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이 모든 존재의 근본적 우발성 - 어떤 것도 존재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 을 드러내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그의 소설 <구토 Nausea>의 전체 플롯을 구축했다. 모든 것이 그저 우연히 거기에 있다. 암시는 우리가 조금 더 자각적이라면 우리 모두가 삶에 대해 절대적 혐오감을 느낄 것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주된 실존주의적 걱정은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TV 앞에 털썩 앉을 때, 우리의 작업실에서 수고할 때, 저녁 식사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때 우리를 엄습할 수 있는 공포와 불안의 감정들로 우리의 가멸성을 대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포와 불안의 감정들은 우리의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으며 완화할 수는 없고 우리 역사가 제공하는 개인의 운명을 단호하고 확고하게 선택함으로써 진정성 있게 더불어 살 수만 있을 따름이다.
침묵하는, 불가해한 우주 앞에서의 불안, 공포, 무의미, 쓸쓸함 - 나는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들을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는 많은 청중을 획득했고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부조리 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주의 기반 없음이나 비합리성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그들은 그러한 생각들을 묵살하는 나쁜 신앙에 빠져 살고 있거나 기만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재하는 신과 함께 남겨진 모든 이전 신자가 있다면, 기쁘게 번성하는 헌신적 무신론자가 있다. 카페에 모여 시오랑 Cioran [의 작품들] 또는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에 대해 사색하는 모든 보헤미안이 있다면,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와인 한 잔과 친구 및 가족 모임으로 자신들의 영속적이지 않은 승리들을 축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삶의 의미는 의문시되지 않는다. 살아남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문제는 자신의 일들을 능숙하게 하고 행운을 희망하는 것으로 대처하는 실천적 사안이다.
대부분의 인간 고통은 통증이나 열악한 건강, 빈곤, 전쟁, 폭력 또는 폭력의 위협, 편견, 계획의 실패, 외로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를 만족시키는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성공하더라도 그러한 관계는 나빠질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얼간이들이거나 우리의 가족 성원들이 혐오스럽고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실수들을 하고 그 실수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괴로워한다. 우리 중 일부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달성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평생 동안 그들을 괴롭히는 과거의 충격적 사건을 털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특정한 환경,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 우리 자신의 약점과 무지, 번영을 가로막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로 인해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이 하는 일이 무의미하고 당신 주변 사람들이 혐오스러움을 알게되더라도 그러한 처지와 탈마법화된 우주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상황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지프가 돌을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개인적 실패의 모든 이야기가 있다면, 삶의 문제들을 해결한 개인적 성공의 이야기들도 있다. 물론 우리가 이룬 승리는 일시적인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전투를 계속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부 문제는 다루기 어렵다. 질병이나 고통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종종 없다. 편견, 빈곤 또는 폭력의 피해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체계적 문제의 피해자이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이 어렵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삶이 부조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미 상실로 고통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러하지만 그것의 근원은 개인 생활의 타락한 생태계에 있다. 관계에서 의미를 찾았다가 무너지면 의미 상실로 고통받을 수 있다. 경력 선택이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으면 의미나 목적의 상실이 뒤따를 수 있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삶은 무의미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임상적 우울증의 경우를 제쳐두면, 의미 상실은 일반적으로 포괄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그것은 특정한 행동들이나 상황들과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우리의 능력 [간의 불일치]에, 행동과 그것들이 가져야 할 의미 간의 불일치에 수반된다. 역사의 도살대라면, 그것은 최근 수십 년 동안 기술적 업그레이드를 받았지만 그것의 동기는 변하지 않았다. 탐욕과 권력에 열망은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세속적이다.
인간의 삶이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은 옳았지만, 인간의 삶은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 오래 전부터 그랬다. 실존주의자들은 추상적인 논리적 확실성이 신앙의 확실성을 대체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어려움을 무시하는 우리의 철학적 전통들의 경향을 역전시킨 것에 대해 칭찬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확실성의 부재가 아니라 확실성의 갈망에 있다. 우발성과 위태로움 precarities 이 삶을 부조리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이 우발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기대와 실제 삶 간의 불일치가] 부조리이다. 결국 우리는 자기 인식의 저주를 받고 불확실한 미래를 의식하는 생물학적 피조물이다. "한 순간 살아있다가 다음 순간 사라진다"는 삶을 부조리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삷을 귀중한 것으로 만든다.
다행히도, 카뮈와 니체는 올바른 곳에 도달했다 - 삶을 위한 고군분투를 궁극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허무주의를 통과하는 우회는 불필요해 보인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신랄한 분석의 산물이 아니라 구원적 미래에 대한 잘못된 희망의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