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자본주의, 낭만주의, 그리고 자연 : 클리앙

리뷰 – 자본주의,번역자본주의낭만주의그리고자연클리앙 낭만주의, 그리고 자연 (존 몰리뉴)

Romantic Anti-capitalism and Nature: The Enchanted Garden
By: Robert Sayre and Michael Löwy
Routledge, 2020

낭만적 반자본주의와 자연: 마법화된 정원
로버트 세이레와 미셸 뢰비 저
루틀리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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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몰리뉴 John Molyneux 는 <아일랜드 마르크스주의적 리뷰>의 편집자이며 글로벌 생태사회주의 네트워크 조정위원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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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뉴 폴리틱스 18권 2호, 통권 70호 / 2021
https://newpol.org/review/capitalism-romanticism-%E2%80%A8and-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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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세이레와 미셸 뢰비의 <낭만적 반자본주의와 자연>은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 재미있고, 정보를 주며, 지적으로 자극적이다.

나오미 클라인 Naomi Klein 은 기후변화에 대해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꾼다”고 말했다. 그녀는 맞다, 그리고 그것이 바꾸는 것 중에는 현재의 정치적 견해뿐만 아니라 과거의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있다. 이것의 고전적 예는 존 벨라미 포스터 John Bellamy Foster 가 그의 주요 저작인 <마르크스의 생태학 Marx’s Ecology>에서 마르크스를 재해석한 것이다. 나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이 행들을 말도 못 하게 자주 읽었다: 

<<모든 인간 역사의 제1의 전제는 물론 살아있는 개인들의 실존이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확인되어야 할 사실은 이러한 개인들의 신체적 조직이며, 그것에 따라 주어진 나머지 자연과의 관계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신체적 소질 자체나, 혹은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자연조건들, 예컨대 지질학적, 지리적, 기상적 그리고 그 밖의 상태들까지 신경을 쓸 수는 없다. 모든 역사 기술은 이러한 자연적 기초에서부터, 또 역사의 진행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통해 이러한 기초가 변경된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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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이데올로기>의 이 행들
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5/german-ideology/ch01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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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르크스의 생태학>을 읽은 후, 나는 그것들을 다르게 읽는다. 포스터의 최근 저서 <자연의 귀환 The Return of Nature>은 급진 생태학적 과학 전통 (랑케스터 Lankester, 엥겔스, 모리스 Morris, 코드웰 Caudwell, 홀데인 Haldane, 버날 Bernal, 니담 Needham 등) 을 부활시켰고, 세이레와 뢰비의 <낭만적 반자본주의>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낭만적 문화적 전통에 대해 비슷한 어떤 것을 한다. 저자들은 1770년대 미국의 여행작가 윌리엄 바트람 William Bartram, 19세기 초 미국 풍경화가 토마스 콜 Thomas Cole,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레이먼드 윌리엄스 Raymond Williams, 그리고 동시대의 운동가, 언론인, 작가 나오미 클라인을 차례로 검토한다. 

이 중에서 윌리엄 바트람에 대한 논의는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며 그가 야생에 대한 사랑과 그것의 원주 아메리카 관리인들에 대한 진지한 존중을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으로 결합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흥미를 끌었다. 또 19세기 시인 존 클레어 John Clare 에 대한 논평을 보고 대단히 기뻤다. 그의 중요성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전에 알고 있던 인물들에 대한 논의 중에서 가장 계발적이라고 느낀 것은 발터 벤야민에 대한 재평가였는데, 그의 사유에서 선견지명이 있는 생태학적 요소를 강조했다. 게다가 여하튼 낭만적 반자본주의를 별개의 세계관으로 고찰하는 서론을 포함해, 모든 분석들은 이론과 시각에 대한 중요한 의문들을 제기한다. 

이 책의 중심적 주제는 “근대 부르주아 문명과 그것의 자연환경 파괴에 대한 낭만적 항의, ... 과거, 전근대적 또는 전자본주의적 가치들의 이름 아래서의 자본주의적-산업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문화적 비판, 또는 반란”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결코 “낭만주의 시대” (c. 1775 – 1850) 로 알려진 것에 한정되지 않는 낭만적 반자본주적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1, 4). 더욱이, 이 세계관에는, 생태계의 대참사에 직면해 인류와 자연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동시대의 투쟁에 귀중한 통찰이 포함되어 있다. 세이레와 뢰비는 이 주장을 지지하는 많은 증거를 제공한다.

이 저작의 뛰어난 특징은 “문학, 여행기, 회화, 유토피아적 비전, 문화연구, 정치철학, 활동가의 사회정치적 저술 등 광범위하게 다양한 분야들로부터 낭만적 문화의 표현들”을 수용하는 그것의 학제적 접근 방식이다(1). 너무나 많은 이론적 연구가 학술 전문분야의 협소한 경계 안에 한정된 채로 머물러 있다. 물론 그런 경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부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생태사회주의 양자 모두의 본성이다. 게다가 사실 그 책은 그 저자들로부터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심오하게 박식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많은 학술적 담론의 난삽하고 거의 불가해한 산문으로가 아니라 매우 분명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쓰여 있다. 이것은 이 책의 지적으로 개방적인 성격과 서로 손을 맞잡고 간다. 나는 이 말로 그것이 절충적이라거나 견고한 마르크스주의적 핵심을 결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양한 원천들과 시각들로부터 배우고 그것들과 겨루는 칭찬할만한 능력을 예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제 이 책이 제기하고 내가 탐구하고자 하는 쟁점들로 넘어간다: 1) 낭만적 관념들의 진실 지위; 2) 전자본주적 가치들에 토대하는 자본주의 비판의 문제; 3) 낭만주의의 계급토대 정식화; 4) 진보에 대한 의문; 그리고 5) 생태학적 반자본주의의 “관념론적” 정식화.

낭만적 관념들의 진실 지위

세이레와 뢰비는 학술적 문화사에서 “낭만적”의 의미를 논의하고 있지만 통상적 담화에서는 이 단어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그것은, 물론, “낭만적 사랑”을 지칭하며, 둘째, 아마도 관련성에 따라, 공상적, 비실용적, 그리고 함의에 따라, 실제로는 진실이 아니라고 간주되는 생각을 지칭한다. 요컨대 멸칭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멸칭적인 연상은 아직도 어느 정도 학술적인 용법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꼭 그래야 하나? 이 책을 좀 길게 인용하자:

<<물론 낭만주의에는 단일한 생년월일이 없다. 그러나 어떤 순간을 상징적인 출발점으로 택하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1755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장-자크 루소가 그의 <인간들 사이에서의 불평등의 기원과 토대에 관한 담론>을 발표한 해이다. 이 놀라운 문헌은 근대 문명에 대한 그것의 맹렬한 비판과 “고귀한 야만인”에 대한 찬양으로, 아마도 최초의 낭만적 선언을 구성한다. …

계몽주의와 진보의 위대한 지지자인 볼테르는 원주민을 그의 철학적 풍자 <캉디드> (1759) 에서 식인 야만인으로 묘사하지만, 낭만적인 루소는 그들을 “세계의 진실한 청년”으로 묘사한다. … 야만인은 “휴식과 자유만을 호흡”하는 반면 문명인은 “죽을 때까지 일”하고 “자신의 예속 상태를 자랑”스러워 한다. 실상, 루소는 야만인은 “문명인이 불평 없이 견디는 굴레에 머리를 숙이는 것을 거부”하고 가장 평화로운 복종보다 가장 위험한 자유를 선호한다고 강조한다. 루소는, 반식민 투쟁을 거의 예견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에서, “야만인들” 사이에 자유에 대한 애정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기아, 불, 강철, 그리고 죽음에 직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 철학자의 “자연상태”는 허구일지도 모르지만, 원시인들의 생활에 대한 그의 묘사는 거의 확실하게 여행자들의 보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어쨌든 루소는 에세이에서 호텐토트족 Hottentots, 카리브인들, 그리고 “아메리카의 야만인들”이라는 특정 집단들을 자주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그 담론에서 루소는 또 자연세계에 대한 근대적인 파괴적 행동을 비난한다. 그는 “벌목도끼가 결코 베지 않았던 광활한 숲”을 찬양하며 문명이 인간을 “자기 자신과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든 것을 유감스러워 한다. 농업의 확대가 “토양 파괴”로, 그것의 비옥도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즉, 그는 뷔퐁의 <박물지> (1752) 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6-7)>>

여기서 나의 요점은 낭만적인 루소의 “고귀한 야만인,” 원주 수렵채집자들 그림은 마샬 살린스 Marshall Sahlins 의 <석기시대 경제학 Stone Age Economics>과 리처드 볼셰이 리 Richard Borshay Lee 의 !쿵산족 !Kung San 연구에서 드러났듯이 “계몽주의자” 볼테르의 그림보다 훨씬 더 사실적으로 정확함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경험적 타당성이 삼림 벌채와 토양 파괴에 관한 루소의 우려에도 해당된다. 

물론 나는 낭만주의 사상가들이 내놓은 모든 주장들과 구상들이 사회과학자들이나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은 사실적으로 진실하다고 판명된 주장들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낭만적”이라는 꼬리표를 경험적 타당성 결여의 명백한 증거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나는 세이레와 뢰비가 이 점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점이 강조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 그 다음, 은유적 진실의 문제가 있다. 세이레와 뢰비가 베버의 문구인 “마법화된 정원” (“마법적 신념을 가진 아시아 문화들”에 해당) 을 채택한 것은 콩고의 삼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인 무부티 피그미족 Mbuti pygmies 에 대한 콜린 턴불 Colin Turnbull 의 매우 “낭만적인” 인류학적 연구를 즉시 떠오르게 했다. 나의 요점은 이 사람들의 “마법적” 신념과 그들의 삼림 환경 및 그 환경의 다른 거주자들과의 “마법화된” 일체성 감각은 문자 그대로 진실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자연과의 그들의 관계에 관한 어떤 은유적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후의 종교가 “무정한 세계의 심정”이자 “인민의 아편”이라면, 이 “마법적” 신념들은 단순히 무지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의 소외되지 않은, 따라서 활기차고 강렬한 관계의 표현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의미하는 것의 동시대의 한 예로, 반 고흐의 멋진 그림들을 보시라. 그의 사이프러스 나무들과 밤하늘의 별들 묘사는 수목학과 천문학 지식 결여로 인한 부정확한 재현들이 아니라 정서적 강도의 표현들이다.

전자본주의적 가치들에 토대한 자본주의 비판

세이레와 뢰비는 이 유형의 비판을 낭만적인 반자본주의를 정의해주는 특징으로 보는데, 나는 그렇게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 비판은 어떤 전자본주의적 가치들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가족의 기원> 3장에서, 엥겔스는 이로쿼이족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정치와 사회를 비판했다. 윌리엄 모리스는 중세 장인 생산의 예술적 성질과 비교하여 근대 자본주의의 생산을 비난했고 그들은 둘 다 혁명적 사회주의적 결론을 끌어냈다. 다른 이들은 봉건적 사회질서의 이상화된 그림의 이름 아래 근대 자본주의를 비판했고 매우 반동적인 결론들을 끌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봉건 사회주의” 절에서 이것을 논하는데, 이 전망은 20세기에, 예를 들어 가령 T. S. 엘리어트 T. S. Eliot, (그것에 의해 노골적인 파시즘으로 이끌렸던)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그리고 J. R. R. 톨킨 J. R. R. Tolkien 의 문학작품에 상당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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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기원> 3장에서
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4/origin-family/ch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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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이 수렵채집 사회들과 원주민들의 가치들에, 특히 자연과의 그들의 관계들의 관점에서, 호소할 수 있고 호소해야 하지만 동시대 사회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평은 또한 현대의 노동 계급의 기존 가치들, 특히 집단적 투쟁에서 창출된 사회적 연대의 가치들을 토대로 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 생겨났지만 자본주의적 불평등과 우선순위에 의해 억제된 인간 발전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미래에서 끌어온 가치들에도 역할이 있다. 마르크스가 <브뤼메르 18일>에서 썼듯이,

<<19세기 사회혁명은 그것의 시를 [영감을]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 관한 모든 미신을 벗어던지기 전에는 그것 자신과 함께 시작할 수 없다. 이전 혁명들은 그것들 자신의 내용을 억누르기 위해 과거 세계사의 회상을 필요로 했다. 19세기 혁명은 그것 자신의 내용에 도달하기 위해 죽은자들이 자신들의 시신들을 매장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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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메르 18일>에서 썼듯이
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52/18th-brumaire/ch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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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낭만적인 전망의 계급토대에 대한 의문으로 직접 이어진다. 

낭만주의의 계급토대

여기서, 나는 이것이 세이레와 뢰비에 의해 제기된 방식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의 결론에서 그들은 “우리가 논의한 인물들의 사회적 출신들은 결코 균일하지 않는데, 이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일반적 시각이 어떤 기계적인 방식으로도 사회계급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129)고 쓴다. 그 자체로 이것은 분명 진실이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들의 전망의 계급토대를 가리키는 것은 저자들의 사회적 출신이 아니라 그들이 끌려 있고, 그들이 이해관심을 대변하고 표현하는 계급이다. 이 시각에서 우리는 하나의 낭만주의가 아니라 그것들이 소속되어 있는 계급에 따라 여러 낭만주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셸리 Shelley 와 모리스는 적어도 프롤레타리아 출신이 아닌데도 노동계급에 끌리고 아마도 노동계급에 의해 잡아당겨진 낭만파인 반면, 워즈워스 Wordsworth, 키츠 Keats, D. H. 로런스 (광부의 아들) 같은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양하게 부르주아 사회주의,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봉건적/귀족적 사회주의를 지정하고 있다. 아마 우리는 비슷하게 서로 다른 낭만주의들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진보에 대한 의문

세이레와 뢰비는 발터 벤야민을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깬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라고 칭송하고 있다 (130).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진보 (및 사회주의) 의 필연성에 대한 결정론적 신념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분명 벤야민의 신망을 높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람시가 그에 앞섰다. 그러나 암시하고 있는 것이 일체의 진보의 부정이고 역사는 단순히 쌓여가는 잔해더미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나에게 매우 문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내 견해로는, 생산력의 발전은 인간의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인간들의 잠재력의 실질적 진보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양하는 우리의 능력을 증대시키고 우리의 기대 수명을 증대시키며 우리의 세상과 우리의 우주를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렇지만, 이 잠재력이 실현되는 정도는 생산관계의 성격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그 관계들이 소외되어 있고 착취적이라는 사실은 인간 생산 잠재력의 모든 증대가 동시에 인간과 자연 둘 모두의 파괴의 잠재력의 증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류의 미래, 실로 그것의 바로 그 존속은 결코 보증되어 있거나 불가피하지 않으며 투쟁의 결과에 의해 좌우 될 것이다. 

생태학적 반자본주의 “관념론적” 정식화

이것은 책의 중심적 테마로부터 다소간 떨어져 있으며 의견 차이가 아니라 나오미 클라인에 관한 세이레와 레뷔의 소견에 의해 촉발된 논평일 뿐이다. 그들은 클라인의 <이것은 모든 것을 바꾼다 This Changes Everything>를 “최상급” 책이라고 기술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에 관한 관념론적 정식화들을 구사하는 클라인의 경향을 비판한다:

<<재난을 낳는 기후변화에 책임 있는 동력을 제시하는 클라인의 방식은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접근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종종 범인을 주로 하나의 이데올로기 - 시장 원리주의, 자유무역 정통, 초과착출주의적 사고방식 (19, 25, 63, 86, 443, 459 – 460) - 인 것으로 그리고 변화를 위한 투쟁을 “세계관들의 싸움”으로 보는 것 같다. 물론 이데올로기는 중요하다. … 그러나 관념들에 일차적 강조점을 두는 것은 그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유물론”적 견해 대신, 순전히 “관념론적” 견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117)>>

이것은 타당한 비판이며, 나는 여기서의 클라인의 경향은 우연이 아님을 덧붙여 둔다. 그것은 현재의 광범위한 환경운동을 반영하고 그것에 호소한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부분적으로는 계급적 이유들로 유물론적 정식화들과 사고보다는 관념론적 정식화들과 사고를 본능적으로 훨씬 더 선호하는 운동이다. 관념론적 정식화는 또한 개량이냐 혁명이냐 문제에 대한 클라인과 그 운동의 애매모호함과 관계되어 있다. 변화될 필요가 있는 것이 기본적으로 일단의 생산의 물질적인 사회적 관계가 아닌 “태도” 또는 “사고방식”이라면, 이것은 실제 물리적 혁명에 의지하지 않고 필요한 변화가 달성될 가능성을 남긴다. 틀림없이, 이 문제에 관한 클라인의 불분명함은 그녀의 도달 범위, 인기, 그리고 영향력을 큰 폭으로 높이고, 따라서 의식적인 전략일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나는 그것 또한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차례로 낭만적인 반자본주의의 핵심 논의와 연결되어 있는 더 넓은 우려와 관련이 있다. 낭만적 전통에 오늘날의 운동에 접목하는 데 유용한 많은 통찰이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고 세이레와 뢰비는 이것을 강조하는 서비스를 행하지만, 낭만주의와 낭만적 정식화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데 필요로 될 것,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견고한 현실성을 희미하게 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위험 또한 있는데, 우리는 이 위험에 주의해야 한다.     

할 말은 아직 많지만 여기서 멈추고 이 책에 담겨 있는 폭넓은 통찰과 다양한 도발적 관념들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찬양하게 한다는 점을 한 번 더 말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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