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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정서 조절에 관한 것이며 그것에 매우 능하다 (스티븐 T. 아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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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T. 아스마 Stephen T. Asmais 는 컬럼비아 칼리지 시카고 Columbia College Chicago 에서 철학 교수이자 정신,번역종교정서조절삶의의미스티븐T아스마마이클프린징클리앙 과학 및 문화 연구 그룹 공동 설립자이다. 그는 <상상력의 진화 The Evolution of Imagination> (2017), <왜 우리는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Why We Need Religion> (2018) 그리고 라미 가브리엘 Rami Gabriel 과 공동 집필한 <정서적 마음: 문화와 인지의 정감적 뿌리 The Emotional Mind: Affective Roots of Culture and Cognition> (2019) 등 많은 책들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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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AEON / 2018년 9월 25일
https://aeon.co/ideas/religion-is-about-emotion-regulation-and-its-very-good-at-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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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자연을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그것은 과학 이전 시대에는 할 수 있을 만큼 그 일을 했지만 당연히 과학에 의해 그 일에서 밀려났다.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물론이고 성직자들조차 그 점에 동의한다: 교황 요한 바울 2세는 1996년에 진화는 사실이며 가톨릭은 그것을 수용하면서 그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확실히 어떤 극단적인 반-과학적 사고가 켄터키에 있는 캔 햄의 창조 박물관 같은 곳들에서 번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변적 입장이 되었다. 대다수의 주류 종교인들은 갈릴레오식 분업의 한 버전을 승인한다: ‘성령의 의도는 어떻게 하늘에 이를 수 있는 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지 어떻게 하늘이 움직이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마, 종교의 핵심은 자연을 설명할 그것의 능력이 아니라 그것의 도덕적 파워가 아닐까? ‘신 없는 유태인’이라 자칭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종교가 망상적이지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망상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우리 인간들은 자연 그대로는 공포스러운 생물체들이라고 – 공격적이고 자기애적인 늑대들이라고 논했다.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면, 우리는 강간할 것이고 약탈할 것이고 돌이킬 수 없게 우리의 삶을 망칠 것이다. 고맙게도,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도 알려져 있는 당근과 채찍 시스템에 의해 자선, 자애 그리고 협동을 향하도록 우리를 이끌 수 있는 종교의 문명화하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껭은 <종교 생활의 기본 형식들> (1912)에서 종교의 핵심은 그것의 신념 체계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그것의 도덕적 약호조차 아니며 집단적 감흥 collective effervescence 을 발생시킬 수 있는 그것의 능력이라고 논했다: 개인들을 협동적인 사회적 집단들 groups 로 통일시키는 강렬한, 공유되는 경험. 뒤르껭은 종교는 일종의 사회적 접착제라고 논했는데, 최근의 학제적 조사연구는 그 견해를 확증해 준다.
종교의 중요한 기능들에 관한 프로이트와 뒤르껭의 주장이 맞기는 하지만,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의 치료법적 파워에, 특히 우리의 정서들을 관리할 수 있는 그것의 파워에 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큼이나 우리의 생존에 중요하다. 인간이라는 종은 두려움, 분노, 갈망 기타 등등 같은, 적응을 돕는 정서들을 느끼는 능력을 타고 난다: 종교는 이 느낌들과 행동들을 가라앉히거나 부추기는 문화적 시스템이었고 이다. 유해한 극단주의 형태의 종교들이 아니라 주류 종교들을 살펴보면 이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주류 종교는 불안, 스트레스 그리고 우울함을 감소시킨다. 그것은 실존적 의미와 희망을 제공한다. 그것은 적들에 대한 공격욕과 두려움을 집중시킨다. 그것은 갈망을 순화시킨다, 그것은 부모-자식 관계들을 강화한다. 이야기를 통해, 그것은 타자들에 대한 공감과 동정의 느낌들을 훈련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에 대한 위안을 제공한다.
정서 치료는 종교의 생동하는 핵심이다. 사회적 유대는 우리가 동일한 토템들을 숭배하기로 동의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애정을 느낄 때도 발생한다. 집단들이 의식들, 전례, 노래, 식사, 애도, 위로, 성자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들, 단식과 희생 같은 고난들을 공유할 때 상호배려의 정감적 공동체가 출현한다. 신학적 믿음들은 이것에 비하면 핏기 없는 추상물들이다.
정서 관리는 삶이 힘들기 때문에 중요하다. 부처는 ‘모든 삶은 고통이다’고 말했으며 우리 모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내가 ‘취약성 문제’라고 부르는 것을 다루기 위해 발달했다. 병이 들면 우리는 사제에게가 아니라 의사에게 간다. 그러나 자녀가 죽었을 때, 화재로 집을 잃었을 때, 또는 말기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때 종교는 일말의 안도감과 일말의 힘을 제공하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또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우리에게 할 만한 무엇인가를 준다.
어떻게 종교가 친한 이의 죽음을 겪은 이들을 돕는지 살펴보자. 분리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사회성 포유류들은 신체적 접촉, 공동식사 그리고 그루밍에 의해 건강을 회복한다. 인간 사회의 애도 관습들은 이 동일한 친(親)사회적 진정 메커니즘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을 다독이고 얼싸안는다. 우리의 신체들은 비탄에 빠진 신체에 직접적으로 태곳적부터 전해져 내려온 위안을 준다. 우리는 사별한 이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 (유대교의 시바 전통, 또는 많은 문화권들에서의 철야 조문 전통을 생각해 보시라).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 관한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사별한 이들이 그들의 고통을 더 큰 낙관주의적 내러티브들 속에 재위치시킬 수 있게 돕는다. 음악도, 위안을 주는 선율들과 다 같이 노래 부르기의 형태로 공유되는 슬픔을 표현하는 데 일조하며 그것을 견딜 수 없고 외로운 경험으로부터 견딜만한 공동의 경험으로 변형시킨다. 친한 이의 죽음을 겪은 이들에 대한 이러한 공동체적인 사회적 관여는 사별한 이들이 적응적인 정서적 변화를 일으키도록 촉진하면서, 하나의 항우울제로 작용할 수 있다.
종교는 또한 내가 ‘실존적 구체화’나 더 정확하게는 ‘실존적 채무’라고 부를 어떤 것으로 슬픔을 관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서방인들은 흔히 자신들을 우선 개인들로 생각하고 이차적으로야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생각하지만 개인적 운명을 실현하는 외로운 주인공이라는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사실보다는 허구에 가깝다. 누군가를 잃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타자들에게 의존해 있으며 대단히 취약한 존재임을 상기시키는데, 바로 그때 종교는 우리를 관계들로부터 떨어뜨리기보다는 관계들의 거미줄 쪽으로 돌려세운다. 예를 들어, 양친이 죽은 지 오랜 후 종교는 당신이 그들을 추모하고 당신이 그들에게 진 실존적 빚을 인정하게 한다. 장례식, 또는 아시아에서의 청명절 행사, 또는 멕시코에서의 죽은 이의 날, 또는 가톨릭에서의 연례 위령미사는 비록 슬픔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들 죽은 사랑하는 이들의 유의미한 영향력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것은 죽음의 비실재성에 관한 자기-기만이 아니라 죽음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교묘한 방책이다. 슬픔은 사랑하는 이들의 가치의 진심어린 인정 속에서 변형되며 종교적 의례들은 사람들이 그 인정을 위한 시간과 심적 공간을 챙겨두는 것을 돕는다.
슬픔 같은 정서는 많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슬픔의 심리적 발생은 인지적 평가들을 수반한다: ‘나는 다시는 내 친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했어야 했다’; ‘그녀는 내 일생의 연인이었다’; 기타 등등. 종교들은 사별한 이들에게 그들의 비극을 순전한 불행 이상의 어떤 것으로 자리매김하는 대안적 평가를 제공하고자 한다. 심리학자들인 미시건 대학교의 포베 엘스워스 Phoebe Ellsworth 와 제네바 대학교의 클라우스 쉐러 Klaus Scherer 에 따르면, 정서적 평가들은, 눈앞의 재난을 넘어 가능한 해결책들이나 응답들을 그려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순행(順行)적이다. 이것이 소위 ‘이차 평가’이다. 일차 평가 (‘이것은 매우 슬프다’) 후, 이차 평가는 상황을 다룰 우리의 능력을 평가한다: ‘이것은 나에게 벅차다’ - 또는, 긍정적으로라면: ‘나는 이것을 견뎌낼 것이다.’ 고통을 다루는 우리의 능력의 일부는 자신의 파워나 주체적 행위능력에 대한 감각이다: 더 큰 파워는 일반적으로 더 잘 다루는 능력을 의미한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상실에 직면할 때의 나의 한계들을 인정하면서도 파워풀한 동맹자, 즉 신이 내 주체적 행위능력이나 파워의 일부라고 느낀다면, 그때 나는 더 활력 있을 수 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 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 God Is not Great> (2007) 에서 종교적 행위들은 종종 마술적 사고나 초자연적 신념들을 수반하기 때문에 종교는 ‘허위적 위안’이라고 주장했다. 많은 종교 비판자들은 그의 비난을 되풀이한다. 히친스와 그의 동료들은 ‘녹색은 졸음이 오게 한다’ 같은 말처럼 일종의 범주착오를 저지르고 있다. 위안이나 위로는 하나의 느낌으로, 강하거나 약할 수는 있어도 허위거나 진실일 수는 없다. 우리는 왜 기분이 좋은지에 대한 판단을 할 때 허위적일 수 있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진실도 허위도 아니다. ‘진실’과 ‘허위’라는 표현은 우리의 명제들이 실재에 상응하는지 여부를 평가할 때만 적합하다. 그리고 확실히 종교의 많은 사실 주장들은 그 방식으로 허위적이다 – 세계는 6일 만에 창조되지 않았다.
종교는 음악이 진짜 위안인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짜 위안이다. 아무도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 피리>가 주는 쾌락이 노래되는 플롯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허위적 쾌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재에 상응할 필요가 없다. 일부 종교 헌신자들이 음악 헌신자들과 달리 자신들의 위안을 부가적인 형이상학적 주장들에 연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왜 우리가 어떻게 종교가 작동하는지를 그들이 안다고 믿어야 하는가? 그러한 신자들은 그들의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의식들과 사회적 활동들이 그들의 치유의 진짜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 히친스와 다른 비판자들은 사실 여부를 기준으로 할 때의 종교의 실망스러운 점들을 종교의 가치와 전반적으로 혼동하며, 그렇게 해서 종교의 핵심을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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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삶에 의미를 준다. 그 밖의 어떤 것이든 종교를 대신할 수 있을까? (마이클 프린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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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프린징 Michael M Prinzing 은 인간의 번영을 연구하는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글은 Greater Good 매거진과 그의 블로그
https://practicalphilosopher.prinzing.net/
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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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Psyche / 2022년 4월 27일
https://psyche.co/ideas/religion-gives-life-meaning-can-anything-else-take-its-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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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은 때때로 신이 없다면 삶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일부 세속적인 사람들은 동의한다. 예를 들어, 철학자 알렉스 로젠버그 Alex Rosenberg는 그의 책 <한 무신론자의 실재 가이드 An Atheist's Guide to Reality> (2011)에서 관찰 가능한 물리적 우주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당신이 이 철학적 주장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들이 신이나 다른 초자연적 존재가 삶이 의미 있는 데 필요하다고 믿는 것 같다는 사실은 심리적으로 종교적 신앙과 삶의 의미 감각 사이에 중요한 연결이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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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신론자의 실재 가이드
https://wwnorton.co.uk/books/9780393344110-the-atheist-s-guide-to-reality
많은 사람들이
https://www.reasonablefaith.org/writings/popular-writings/existence-nature-of-god/the-absurdity-of-life-without-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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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들은 삶에서 인지되는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는 방법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삶을 이해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제안하고, 다른 사람들은 삶에서 가치와 의의 significance 를 보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들은 종종 단순히 사람들이 다음 진술들에 얼마나 강하게 동의하는지 묻는 것만으로 삶의 의미를 평가한다: '현재 나는 내 삶이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리서치는 삶에서 인지되는 의미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아이디어를 일관되게 지지해 왔다. 1970년대의 한 연구에 따르면, 수녀들은 평신도보다 그러한 측정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보다 최근에 2021년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들보다 삶의 의미를 더 많이 경험한다고 보고했다. 수많은 다른 연구들이 종교성이 삶에서 인지되는 의미와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의미 감각에 위협이 가해졌을 때 사람들이 기적적인 사건들에 대한 더 많은 믿음을 보인다는 실험적 증거도 있다. 이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인지를 강화하기 위해 종교로 눈을 돌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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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https://journals.sagepub.com/doi/10.1177/1088868313518487
다른 사람들은
https://psycnet.apa.org/record/2019-00523-001
1970년대의 한 연구
https://psycnet.apa.org/record/1970-14434-001
2021년에 발표된 연구
https://psycnet.apa.org/record/2019-40424-001
수많은 다른 연구들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09265660700044X
https://psycnet.apa.org/record/2005-13343-015
실험적 증거
https://link.springer.com/article/10.1007/s10943-015-0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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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종교가 실존적 위안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관찰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세기부터 철학자 (예: 프리드리히 니체), 소설가(예: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사회학자 (예: 에밀 뒤르켐)는 종교에서 멀어지는 사회적 경향이 의미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최근 데이터에 따르면, 전 세계 사람들이 점점 덜 종교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세속 사회가 종교의 실존적 혜택을 복제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앙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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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https://aeon.co/essays/what-nietzsche-learnt-from-diogenes-the-cynic
최근 데이터
https://www.worldvaluessurvey.org/wvs.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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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종교가 사회적 접착제처럼 작용하여 신자들을 같은 생각을 가진 공동체로 끌어들이는 경향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그러한 커뮤니티 내에서 사회적 지원과 소속감을 발견하며, 이것은 삶에서 인지되는 의미의 강력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성서 연구 그룹에서 찾을 수 있는 친밀한 개인적 관계들을 상상해 보시라. 따라서 종교에서 삶이 의미 있다는 느낌으로 가는 한 가지 경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하다는 이 감각을 통해서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설명을 '사회적 중요시 가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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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접착제처럼
https://journals.sagepub.com/doi/10.1177/108886830935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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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가능성은 종교적 신앙이 사람들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장대한 도식 grand scheme of things 에서 중요하다고 느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관측 가능한 우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오래되었다. 직경은 약 930억 광년이고 나이는 140억년이다. 그런 배경에서 일부 사람들이 인류를 완전히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스티븐 호킹 Stephen Hawking 이 말했듯이, 과학은 인류가 '천억 은하 중 하나의 외곽 교외에 있는 매우 평범한 별 주위를 도는 적당한 크기의 행성에 있는 화학적 거품'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고무적인 생각은 아니다. 사실, 앞서 언급한 실험에서, 참여자들의 의미 감각을 축소시키기 위해 사용된 '위협'은 광대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의 작은 삶에 관한 에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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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이 말했듯이
https://www.imdb.com/title/tt1558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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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종교가 등장한다. 문화인류학자인 어니스트 베커 Ernest Becker는 <죽음의 부정 The Denial of Death> (1973) 에서 종교적 신앙은 우리를 무한한 존재와 연결함으로써 인류가 우주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부터 사람들을 완충시킨다고 주장했다. 많은 종교 전통에는 우주의 기원과 목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가 더 높은 권능 power 과 어떤 종류의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삶은 장대한 계획의 일부이며, 우주가 '당신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아이디어를 찾는다:
제가 주의 하늘과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과 주께서 두신 달과 별을 생각할 때에 주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이 무엇이고 주의 돌보심 하시는 사람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 그들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그들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우리의 작은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고 시사하는 것 같다. 이것을 믿었던 사람이 자신의 삶에 우주적 의의가 있고 따라서 많은 의미가 있다고 인지했던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설명 - 종교 신앙이 우주적 의의 감각을 함양함으로써 삶에서 인지되는 의미를 뒷받침한다는 관념 - 을 '우주적 중요시 가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후보 설명은 랍비 해롤드 쿠쉬너 Harold Kushner에 의해 잘 요약되었다. 그는 종교의 중요성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종교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우리를 데려옴으로써 우리에게 고독의 역병에 대한 치료법을 제공한다 … 종교적 믿음은 또한 다른 더 깊은 인간의 필요, 아마도 모든 인간의 필요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것은 어떻게든 우리가 중요하고, 우리의 삶이 무언가를 의미하며, 우주의 일시적인 순간 이상인 무언가로 고려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이다.
이 가설을 테스트하기 위해 나와 심리학자 패티 반 카펠렌 Patty Van Cappellen과 바바라 L 프레드릭슨 Barbara L Fredrickson은 최근 미국 전역에서 온 3,000명 이상의 참가자가 포함된 네 개의 연구들을 수행했다. 우리는 설문 조사를 이용하여 종교 행사 참석, 개인 관행 (예: 기도), 삶에서 종교의 중요성에 대한 자체 평가를 포함하여 종교성의 다양한 측면들을 평가했다. 우리는 연구 참가자들이 '내 삶 전체에 의미가 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의미 있는 활동과 추구에 할애할 수 있다'와 같은 진술에 얼마나 강하게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지를 묻는 설문지를 사용하여 삶의 인지된 의미를 평가했다. 우리는 또한 참가자들에게 '내 인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하다'(사회적 중요시) 또는 '내 인생은 우주의 장대한 도식에서 중요하다'(우주적 중요시)와 같은 진술에 얼마나 강하게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지를 묻는 설문지를 사용하여 사회적 및 우주적 중요시에 대한 인식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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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연구들
https://journals.sagepub.com/doi/abs/10.1177/0146167221106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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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연구들 모두에 걸쳐, 결과는 사회적 중요시 가설과 우주적 중요시 가설을 일관되게 지지했지만, 우주적 중요시 가설이 두 가지 설명 중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도 시사했다. 다시 말해서, 종교성과 삶의 인지된 의미 사이의 상관 관계는 인지되는 중요시의 두 가지 형태 모두에 의해 통계적으로 설명되었지만 인지된 우주적 중요시가 그 연관성의 훨씬 더 큰 비율을 차지했다. 이것은 종교성이 삶의 인지된 의미와 연관되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또한 우주적 의의의 인지와도 연관되기 때문임을 시사한다.
이 연구들이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아브라함계의 일신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를 지지하는 미국에서 수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른 문화들에서는 상황이 매우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종교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이 서구적 맥락에서) 이 발견들이 정확하다면, 그것들은 세속적 서구 사회가 종교의 실존적 혜택을 재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불행히도 데이터는 비관적 대답을 제시한다. 종교가 주로 종교에서 오는 사회적 자원 때문에 삶에서 인지되는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면, 종교적 조직들을 대신하기 위해 사회적 조직의 새로운 형태들이 개발될 수 있다. 사실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이미 많은 '무신론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러한 커뮤니티들은 회원들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리서치는 이 세속적 대체물들이 우주적 의의에 대한 인지를 뒷받침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종교적 신앙보다 인지되는 의의의 덜 강력한 원천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종교적 믿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주적 의의 감각을 함양하는 것이 가능할까? 과학에 기여하거나 (즉,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 기후 위기 또는 기타 글로벌 위협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하고 좋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영향은 우리 행성의 비교적 변변치 않은 규모에 국한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행성은 우주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더욱이, 노력이 성공적이었다 하더라도 의의의 이 세속적 원천들은 모든 사람에게 가용하지는 않은 엄청난 양의 노력, 헌신 및 기회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종교는 삶에서 인지되는 의미의 독특한 원천이 될 수 있다.
당신이 종교적이지 않다면, 당신은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쓴 칼 마르크스의 편을 들 수 있다. 즉, 종교가 긍정적 환영들을 조장함으로써 삶이 의미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위안이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다른 한편, 당신이 종교적이라면, 당신은 이 리서치를 통해 신앙의 중요성,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데 있어 신앙이 하는 독특하고 아마도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입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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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쓴 칼 마르크스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3/critique-hpr/intro.htm
긍정적 환영들을 조장함으로써
https://psycnet.apa.org/record/1988-169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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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리서치의 분명한 함의 중 하나는 자신들의 삶이 의미 있다는 개인들의 감각은 그들 자신의 의의에 대한 그들의 인지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양한 방식들로 중요할 수 있다. 따라서,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개인들에게든, 공동체들에게든, 아니면 심지어 우주의 장대한 도식에서든 중요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