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13편 ㅡ 공부에서 중요한 분별 대상 : 클리앙

글의 경고문

1. 저의 공부실력 수준은 미천하나 제가 고통을 겪으며 미약하게나마 깨달은 것들을 명시화하고 필요한 이들과 나누기 위한 글입니다. 

즉 공부 입문자 왕초보가 왕초보 다음 단계인 "초보"로 입문 하기 위해 겪었던 것을 저와 비슷하게 심적/상황적 어려움을 겪는 입문자들에게 쓰는 글이니 공부의 중/고수분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겁니다. 

2. 다수를 위한 글이 아닙니다. 즉 타이틀 등에서 소수를 위한 글이라는 말에 흥분 상태로 와서 논쟁하시려고 하시는 분은 많은 것을 알지만 그런 분들과 논쟁을 하는 의도로 쓴 것은 아니며 여기서 소수는 엘리트 의식과 폐쇄주의를 지향하는 의식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즉 그런 흥분논쟁상태로 글을 클릭하신 분들은 안심하고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글의 가독성& 정리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저자인 제가 시간 날때 빠르게 - 거의 대부분 폰으로 쓰며,공부편ㅡ공부에서중요한분별대상클리앙 글의 목적도 상업 용도나 인기등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한 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 비춰보아 맞는 말이 있는지 독자인 내가 나아가기 위해 이런 글에서 취할 것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저자의 의도에 집중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번 글에서도 저번 편과 같이 "공부에서 개인적으로 중요한 차이를 줬던 마음"에 대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중요한 차이를 준 마음: 구분



저는 어린 시절 좀 심리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었고 그 결과 꽤 오랜 기간  "구분을 하지 말자" 라는 모토로 인간관계를 

둥글둥글하게 가져왔습니다. 이런 심리나 시각은 인간관계에서 어찌 보면 그 당시에는 저만의 주어졌던 상황, 의식에서 필요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모든 것에 일반화를 할 수는 없는 법이죠. 

공부에도 이런 곳이 필요한 것이 있지만 

위의 저런 모토 자체가 틀렸다기 보다는 어디에 저 사고를 제한하거나 어디에 적용할지 기준이 없이 

무분별하게 저런 마인드를 덮어버리는 식의 태도가 저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사실 학문을 다루는 영역은 '정확하게 어느 차원/상황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 라는 것이 중요하기도 합니다. 

사실 삶 전체에도 마찬가지이긴 하죠. 


이를 물론 너무 시시비비를 가리면 안되는 분야에 까지 무분별하게 '무조건 시시비비를 가리고 따지고 분별해라'를 

마구잡이로 적용하면 안될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삶과 우주, 의식에서 모든 것에 대해서 뭐에는 뭐를 적용하라는 것을 다 알 수는 없고, 

이 글의 작성자인 저 또한 그걸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오늘 작성하는 저의 글이 그 문맥,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사람마다 겪고 있는 상황, 문맥, 변수들은 

제각각이기에 조금만 달라져도 

제가 지금 쓸, 주장하려는 논리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왜 이 글을 쓰냐구요?

단지 공부의 특정 영역에서 저와 비슷하게 사고의 오류를 가졌던 분들에게 몇가지 짚어보거나 

혹은 논의해 보면 좋을 주제를 나눌 수 있을 뿐입니다. 



자 그럼 저자인 제 학습 관련 여정에서 

 뭐를 시시비비를 가리고 분별을 잘 했던 게 중요했던 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앎의 차원을 잘 분별하라


저의 경우 메타인지를 강조하죠? 메타인지는 학습 분야에서 거의 대부분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라는 '앎' 주제로 많이 한정해서 말하죠. 

근데 저는 사실 이런 학습적 앎 보다는 좀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 메타인지 라고 할만한 개념을 보기도 했습니다만.. 이번글의 

주제는 아니니 넘어가겠습니다. 


앎의 차원을 분별하라는 말은 

그냥 지금 내가 뭔가를 읽어서 알게 된 그 상태와 

진짜 이 지식 대상을 마스터 한 그 시점의 상태 두 가지 단계를 구분하라는 뜻입니다. 


왠지 모르게 너무 쉬운 말인데 왜 굳이 이걸 쓰냐면.. 

사실 인간은 반드시 속게 됩니다.(물론 저의 경험입니다)


내가 뭔가를 지금 학습을 했을 때, 

거의 대부분 뭔가를 정보를 보고 읽고, 이제 정보를 봤으니 몇번 더 반복하면 되겠지 식으로 

관성적 마음에 빠져서 

지금의 습득 수준을 반드시 과대평가하더군요. 

(흔한 예: 수학 풀이를 선생님 강의 듣고 논리가 뭔가 아하 이해가 되었음 ㅡ 

이 아하!를 징표 삼아서 아 이제 난 알았다!라고 하지만

나중에 다시 풀면 틀림)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많은 공부 천재들의 글에서 복습의 중요성이 나오는데 그 학습 아이큐 높은 친구들도 사실 

비슷한 것이죠. 



저의 경우 그래서 학습을 했을 때 의도적으로 저번에 창피 당할 정도로 학습 수준 자신만만했는데 

결과가 어떠했는지, 

예로 시험 결과와 그 전의 학습 수준과 나의 확신 정도를 반드시 상기하면서 

그 것이 지금 반복될 것인 지를 명확하게 판별하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예로 혼란스러운 상황 등이나 스트레스 상황을 가정하고 상상을 해봐서 이 정도 수준의 개념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험에서 어느 정도 확률로 머리에서 남아 있을 지를 알아야 하는데 

현재 학습 대상의 회상이나 얼마나 자연스럽게 복구가 되는 지를 지금 판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는 

여러분 개인 마다 다르겠죠)

이런 식으로 강하게 테스트를 해봅니다. 

물론 여기서도 귀찮아서 대충 아냐 됐어! 식으로 하곤 했지만 이런 습관 까지 고쳐야겠죠. 


이렇게 앎의 수준은 

현재 대충 하고 학습 수준을 과대평가 하는 마음에 의해서 스스로에게 속기 쉽습니다. 

이를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



#구별해야 할 2번째.. 마음


이 두 번째 주제는 첫 번째(위에 언급한 앎의 수준에 대한 분별)와 달리 더 중요합니다. 

앎의 수준의 분별이 단지 학습 차원이라면, 

이번 주제는 학습을 관장하는 마음적 / 인생을 보는 시야를 주는 주제로 더 포괄적입니다. 


바로 운명론에 기반한 파생적 마음:

나는 타고난게 있다 없다로 ㅡ 이걸 이룬다 못 이룬다 를 

파악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논하겠습니다.


저자인

저의 경우 제가 원하는 만큼 제 자신의 머리가 좋지 않았고, 

언제나 목표를 힘차게 뱉고 그렇게 말하고 다니더라도, 

사실 내면에서는 그걸 믿지 않았음을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다들 이런 경우 있죠. 뭔가 이루겠다고 말은 하고 다니지만 

막상 사실 내가 이걸 이룰 운명일까 하고 이거 다 정해진 거 아닌가 하고 

불안한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진 것일 겁니다. 


즉 내가 선언한 목표와 이걸 진짜 내가 믿는가 라는 것과의 괴리죠. 

지금 이제 제가 말할 두 번째 주제가 이걸까요? 이게 분별해야 할 '마음'이라는 주제일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좀 더 나아가겠습니다. 


사실 왜 믿지 못했는지는 단순합니다. 

인간은 사실 운명론적 인생관에서 비롯되고 파생된 시각에 묶여있고 이를 극복하는게 바로 성취의 여정입니다.

여기서 운명론은 기독교나 사주 등이 아닙니다ㅡ

1. "뭐를 성취 하는 놈"은 정해져서 절대적으로 딱보면 파악할수 있는 x가 있다 라은 마음시각에서 나온 파생적인 이론&인생관을 뜻하며, 

2. 내가 이걸 이룬다 못 이룬다가 정해져 있지 않나 하는 무의식을 뜻합니다. 

2번이 중요한데 위에 언급했듯 아무리 그렇게 이룬다고 큰소리 뻥뻥쳐도 진짜 믿는 것과 무의식은 따로 노는 것까지 포괄해서 봐야 하기에 2를 중요하게 언급하는 거구요.


이렇게 운명론을 믿지 않으면서도 뭔가 이 성공을 결정짓는 요인이 있는가, 나는 해당되는가라는 

마음으로 심란하고,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이런 것(단지 내가 선언한 목표와 내가 진짜 이를 믿는가 사이의 괴리를 자각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내 마음에서 펼쳐진 의식의 존재인 내가

어떤 측면에서 '나'이고,

그 '나'라는 주체는

무엇을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인가"를 

'인과 관점'에서 명확히 하는 것이더군요. 




즉, 내가 이룰 수 있는가 없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룸과 성취라는 것은 인과관계가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뭐가 진짜 중요한지 봐야 합니다. 

운명이 있다 없다, 성취에 필요한 운명적 조건을 내가 가졌다 아니다 를 논하는 것은 끝이 없는 말입니다. 

이는 우주적 인과에서 결과 단의 하단인데 우리는 마치 이게 원인으로 보게 되며, 이런 시각과 파악은 결과에 불과한 인과사슬을 원인으로 착각했기에 틀렸다는 말입니다!


이런 운명론적 시각에서 나는 이룰수있다 없다를 보는 생각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의 전제(바른 원인)에 해당하는게 있음을 알고 그걸 세우는 것입니다.


나는 그 조건(운명이든 능력이든 아이큐든)이 현재 없더라도, 배우면서 만들어 가는 "행동의 인간이다"를 명확히 의미를 '세우는' 겁니다. 

만일 내가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나는 그 상황에서 배우고 다시 일어나고 나아갈 것이다. 

이 또한 '성취의 우주적 인과'를 바르게 거쳐가고 그 인과를 바르게 달성해서 결과에 해당하는 내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겁니다. 


즉 내가 운명적으로 이룰 놈인지 아닌지 가 불안의 원인일 때, 이를 논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이 논리 앞에 와야 할 것을 논하는 것이며, 

우주적 인과법칙이 존재하고, 

나는 바른 인과를 가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이 인과 작용안에서 바른 것들을 거치고 

나아가는 행동 주체가 되겠다 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

(여기서 "바른 것들을 거친다"는 것은 우주적 작용에서 최소한 필요조건등을 거칠 것을 공짜 없이 거치겠다는 마음입니다. 

공짜 없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우리는 생고생이나 불필요한 고행을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만, 전혀 다른 영역입미다. 바른 이룸에서 불필요한 행위는 피해야 하는 것이며 바른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이런 잘못된 행위들을 피하겠다는 것이므로 둘을 구분해야 합니다. 

즉 원인-결과 인과 사슬에서 정확한 원인을 알고 분별하는 눈을 기르는 과정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를 가지는 것이죠. 

자신의 무지와 방어기제, 회피하고 싶은 본능들로 인해 불필요하게 멀리 돌아가는 식의 행위를 끊겠다는 의지와 그에 따른 의식과 목표 세움, 집행이 있어야 하는 강하고 바른 과학적 마음을 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단지 운명으로 정해지는 것처럼 파악한 냄새가 나는 

"내가 운명적으로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에 

번민하는 

의식 수준에서 좀 더 분별력이 생긴 것입니다. 


운명적으로 이룰 수 있다 없다 라는 논의로

 불안해 하는 마음상태는,

스스로의 의식을 이끌고 물질계에서 주체로 행동하는 사람의향기가 나지 않는 잘못된 시각이 원인이 되어 출력된 명제입니다. 


'나'와 '성취'의 진정한 주체는 

조건이 주어지면 이루는 그냥 비디오 안의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바른 태도를 가진 행동의 주체가 말한 문장으로서의 향기가 나야 할 것입니다.


"나는 어려움이 와도 여기에서 다시 일어날 것이고, 

상황에서 배울 것이다" 라고 말하며, 

바른 인과 속에서 바른 "원인"을 세워야 할 것이며, 

이 바른 '원인'은 이런 주체적 행동 자세, 태도가 담긴 차원의 나를 정의해야 하는 것이겠죠. 



그럼 이게 "구분" , '분별'과 무슨 상관일까요?

내가 현재 공부를 하는 것의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 

위에 말했듯이 우리는 너무 불안하기에 

자신은 과학만을 믿는다고 믿는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결국

내용적으로 보면 기독교계열 운명론과 다를바 없는 운명론적 사고에 불과한 믿음과 마음상태로 빠지기도 합니다. 


현대 시대에는 과학에서 밝혀진 사실을 자기가 믿고 싶은 쪽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 

이전 세대에서 운명론을 사용하던 전혀 다르지 않은데도

과학이라는 말이 붙었다고 자기가 과학적인 줄 착각해서

그 기복적 정신 기제와 다를바 없이 똑같게 쓰기도 하죠. 

(과학에서 나온 표현이나 명제를 복사해서 입으로 말한다고 앵무새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무엇에 연결해서 보았는가 라는 동적인 파악이 과학인데 말이죠...)


그런데 학습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결국 

그 학습을 하는 '나'와 행위의 의미, 그 행위의 주체와 의미 등을 

다시 재정의하고 잘못된 것들과 구분해서 정밀화 하는 작용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물론 위에 나왔듯, 

'태도', '주체적으로 행동을 함' 등 동적인 영역 차원에서 

우주적으로 나의 행위인 "학습과 성취"가 가진 의미에 대해서 재정의하고 고찰해야 할 것이구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두번째 앎 구분의 주제는

이뤄야 한다고 마음이 정리된 일이 맞다면

내가 이룰수 있는 운명론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시각에서 지능적 증거나 과학이론을 외부 위주로 찾기보다

먼저 그 능력과 "나"를 행위와 바른 시각과 바른 시각을 세우고 행동을 실천하는 존재인 나의 차원에서 찾고 재정의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현학적으로 쓴 말로 보이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의 연재글에서 제 자신 정보나, 느낀점등 주관은 별로 없이 건조하게 작성해왔지만 오늘 글은 

이런 제 경험, 느낀 점이 추가가 되니 약간 이례적인 글입니다.


저의 경우 이렇게 

'성취를 주는 진짜 우주적 원인', 혹은 "성취를 주는 나'라고 해야 할 것에 대한 '진정한 주체"는 무엇이 되어야 하며

나는 무슨 생각과 태도로 공부에 임해야 할 지를 고민했고, 

이러한 주체적 자세로 나의 학습행위와 성취를 재정의했을 때 절망적인 상황에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상당히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이며, 저의 지혜나 글, 지적 수준에서는 역시 쉽지 않습니다만, 

어떤 정신적 희미한 느낌이라도 공유가 되었으면 합니다. 


독자분들도 자신의 한계나 부정적인 생각으로 좌절을 겪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럴 때 한번쯤, 

위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만의 정신으로 답을 발견하시고 돌파를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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