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진보에 관한 노트들 (조셉 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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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시버 Joseph Shieber 는 인식론,번역철학의진보에관한노트들조셉시버클리앙 언어철학, 철학사에 관한 여러 논문의 저자이다. 그의 저서 Testimony: A Philosophical Introduction 가 2015년에 Routledge 에서 출간되었다. 그는 라파예트 칼리지의 철학 교수이며 이전에 MIT, 브라운 대학교 및 코네티컷 칼리지에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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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3 Quarks Daily / 2022년 12월 12일
https://3quarksdaily.com/3quarksdaily/2022/12/notes-on-progress-in-philosoph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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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게도,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는 모든 철학을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고 언급했다. 실제로는 그는 이렇게 썼다: "유럽 철학 전통의 가장 안전한 일반화는 그것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들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학자들이 미심쩍게 그의 저술들에서 추출한 체계적 사고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들에 산재해 있는 일반적 아이디어들의 풍부함을 암시한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자, 화이트헤드는 이 진술을 우리가 플라톤에서 찾을 수 있는 "일반적 아이디어들의 풍부함"에 대한 찬사로 의도했다. 그러나 이 진술을 읽는 또 다른 방식, 즉 철학 자체에 전혀 아첨하지 않는 방식이 있다.
이 덜 아첨하는 다른 읽기에 따르면, 철학자들이 여전히 논의하는 모든 주요 아이디어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플라톤에 있었다. 이 독해가 철학에 아첨하지 않는 방식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첫째, 그리고 가장 명백하게 이 진술은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철학에 중요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없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큰 아이디어들은, 그 진술은 이렇게 읽힐 수 있는데, 이미 플라톤 안에 있었다.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은 각주에 불과한 기여, 즉 주석이나 사소한 개선만 추가할 수 있었다.
둘째, 이 진술은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자가 그의 입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라는 – 그럴듯한 – 점을 고려할 때에도 아첨하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플라톤의 강점 중 하나는 그가 종종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들뿐만 아니라 그 질문들에 대한 서로 다른 답변들도 고려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지식이란 무엇인가?" 물을 때, 그는 그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답변들을 저울질한다.
논증을 위해 플라톤이 지식의 본질에 대해 다섯 가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그 중 네 가지 견해를 거부하고 한 가지 견해를 지지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화이트헤드는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섯 가지 견해 중 하나를 지지하는 철학자는, 그 견해가 심지어 [플라톤 저술에서 플라톤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가 거부한 견해 중 하나라도 플라톤에 대한 논평을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정당화될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이미 가능한 위치의 공간을 매핑했기 때문이다. 이 사고 방식에서는, 모든 후속 철학자들은 단순히 우리가 그 공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대해 - 가능한 위치 중 어느 것이 철학을 위해 우리가 측설해야 하는 실제 위치이냐에 대해 - 논쟁하고 있다.
이 두 번째 읽기에는 철학의 진보에 대한 회의론에 대한 추가적인 이유가 있다. 플라톤에 동의하지 않는 철학자라도 그 의견 차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철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일치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불일치 해결"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더 이상 "패배한"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면 말이다.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 Thomas Kuhn 은 요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비과학 분야들이 발전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그것은 개별 학파들이 발전하지 않기 때문일 수 없다. 오히려 항상 서로 경쟁하는 학파들이 있기 때문임에 틀림없으며, 각 학파는 끊임없이 다른 학파의 기초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철학이 진보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진보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쿤, <과학혁명의 구조>)
생물학에서는 더 이상 리센코주의 Lysenkoism 나 라마르크주의Lamarckism 의 저명한 옹호자를 찾을 수 없다. 천문학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지지하거나 물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다. 대조적으로, 쿤의 인용문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200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몇 가지 두드러진 예를 들자면, 우리가 여전히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토마스주의, 흄주의 또는 칸트주의의 더욱 정교하고 미묘한 버전의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철학의 진보라는 아이디어를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철학의 전체 역사가 불과 몇 개 - 10개 미만! - 의 서로 다른 기본 철학적 입장들의 되풀이되는 흥망성쇠로 이뤄져 있음을 시사하는 자세한 논변으로는, Randall Collins, The Sociology of Philosophy 를 보시라.)
그러나 아마도 철학과 자연과학을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대신 수학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유명하게도, 유클리드의 병렬 공준을 거부하는지 여부와 거부한다면 어떻게 거부하느냐에 따라 서로 독립적인 일관된 기하학 체계들이 있다. 유사하게, 집합 이론에 대한 서로 독립적인 일관된 공리 시스템들이 있다. 그 시스템들에서 칸토어 Cantor 의 연속체 가설의 지위는 서로 다르다. 이 비교를 염두에 두면, 당신은 경합하는 철학 학파들을 독립적이고 내부적으로 일관된 사고 체계들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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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독립적인 일관된 기하학 체계들이 있다
https://mathshistory.st-andrews.ac.uk/HistTopics/Non-Euclidean_geometry/
집합 이론에 대한 서로 독립적인 일관된 공리 시스템들이 있다
https://www.quantamagazine.org/to-settle-infinity-question-a-new-law-of-mathematics-201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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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진정한 아크라시아 akrasia [자제력 없음]의 가능성을 허용하는지 또는 칸트가 물자체를 이해 make sense of 할 수 있는지와 같은 내부 질문들이 있고, 그 다음 우리가 인과(因果)에 대해 토마스주의를 채택해야 하는지 흄주의를 채택해야 하는지와 같은 외부 질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