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차 세계대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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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순간, 미국의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인 오거스타( USS Augusta)호는 영국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의 뉴포트(Newport)를 향해 운항중이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 계획의 최종 승인자였던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바로 이 배에서 작전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1932년 첫 대통령 선거를 시작으로 무려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5년 4월, 그의 네 번째 대통령 임기중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당시 부통령이던 트루먼은 훗날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남게 되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대통령이자 국군 통수권자라는 자리를 넘겨받습니다.


 이어 대통령 명의의 발표문이 미 전역에 송출됩니다. 


"16시간 전 미 공군은 일본 히로시마의 주요 군사 기지에 폭탄을 투하하였습니다.  이 폭탄은 TNT폭탄의 2만 배,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탄인 영국의 "그랜드 슬램"보다도 2천 배나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진주만에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무기들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으며, 더 강력한 형태의 무기들이 개발 중에 있습니다.....(후략)"


 같은 시각 모스카바에서는 스탈린이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스탈린에게도, 그 외 모든 러시아인들에게도 원자폭탄의 위력은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베를린을 점령해 독일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미국이라는 너무도 강력한 힘 앞에서 불안감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이 보유한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만한 무기가 사실은 일본이 아닌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50만 명에 달하는 강제노동자들을 동원해 소련판 '맨하튼 프로젝트(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1번 임무'를 강행하게 됩니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집니다. 이 때 150만의 소련군은 국경선을 넘어 중국과 만주, 그 외 각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에서 일본 천황인 히로히토의 음성이 담긴 옥음방송이 전국으로 송출되었는데,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때 처음으로 천황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히로히토는 '항복'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대신에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26일 포츠담 회담에서 발표. 독일의 항복 이후에도 항전을 계속하던 일본에게 항복을 촉구하는 내용)의 내용을 수용하기로 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우회적으로 패배를 시인합니다. 추축국(Axis powers, 독일, 이탈리아, 일본) 중 일본이 마지막으로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의 남한 파병을 결정한 것은 바로 트루먼 대통령입니다. 1953년 트루먼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전쟁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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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제 2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을 기준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931년 이후로 일본은 중국과 크고작은 교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1937년 7월에는 전면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미 조선과 만주 지역을 정복한 일본은 서구 열강들에게서 자신들의 지위를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 여겼습니다. 미국(필리핀), 프랑스(베트남),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영국(홍콩, 말레이시아, 인도 등) 등의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 각국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건설하여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일본의 중국 침략에 반대하던 미국은 중일전쟁에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를 도왔지만, 직접적인 군사 개입은 없었습니다. 미국은 2차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한동안 고립주의를 고수했습니다. 다시 말해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황에서 미국은 중립국으로 남고자 했던 것입니다. 대통령 프랭크린 루즈벨트는 미국인들에게 여러분의 아들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습니다.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지배하던 인도네시아 지역의 천연자원, 특히 석유가 필요했습니다. 미국은 일본은 제재하기 위해 일본으로의 석유와 철강석 수출을 금지하였는데, 당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에서 수입하던 일본 입장에서 이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군부에서는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도 초강대국인 미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을 공격해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되, 전쟁을 지속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후에는 평화협정 테이블에 미국을 앉혀두고 자신들의 요구사항도 관철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해군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는 이마저도 무모한 계획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야마모토는 일찍이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자주 미국을 오갔기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힘을 가진 나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치독일과의 동맹도 반대했습니다. 그런 그도 일국의 군인이었고, 일국의 군인은 결국 나라를 위해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미국의 군사 요충지였던 진주만(Pearl Harbor)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하와이 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은 비행장, 항만시설, 수리시설, 탄약고, 연료 저장고 등의 군사시설을 갖춘 있는 미 해군과 공군의 주요 기지 중 하나였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반경 수천 킬로미터 안에는 오로지 바다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그만한 군사시설은 없었습니다.

 이전까지 미 함대는 주로 캘리포니아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 함대를 진주만으로 옮겨 일본을 압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태평양 함대의 수장이었던 제임스 리차드슨(James Otto Richardson)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는 진주만이 미 본토로부터 너무 떨어져 있어서 전시 보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주만의 방어 체계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지역(하와이)에는 백인 여성이 부족해 군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다고도 했습니다. 루즈벨트와 리차드슨은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그들의 갈등은 결국 리차드슨의 해임과 강등으로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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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진주만이 위치한 오아후 섬을 모형으로 만들어 공습 경로와 목표물 타격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당시 하와이 지역에는 많은 일본인 이민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 군사시설을 몰래 염탐하는 간첩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미군은 하와이 지역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그들의 군사시설을 사보타주(sabotage, 적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행위)하는 것을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을 더 경계한 것입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미군의 태평양 함대를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고, 그 틈을 타 남방작전(일본의 동남아시아 지역 정복계획)을 진행하려 했습니다. 1941년, 유럽에서는 2차대전이 한창이었고,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자국 방어에 급급한 유럽의 열강들이 동남아시아 식민지까지 지켜낼 여력은 없었습니다. 일본은 이를 노렸습니다. 단, 그들의 계획에 유일한 걸림돌인 미국의 개입을 어떻게든 지연시켜야 했습니다. 따라서 진주만 공격의 성공 여부는 향후 일본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 지을만큼 중요했습니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은 주미일본대사인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郎)에게 훗날 헐 노트(Hull note)라 불리는 외교문서를 전달합니다.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일본군이 철수한다면, 미국은 그동안 일본에 행했던 경제적 제재를 해제할 것이고, 미일 양국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길 희망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은 미국을 공격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습니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이 머지않아 일어날 것임을 예감하게 됩니다. 일본의 기습공격도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어디일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만일 일본이 미국에 선제 공격을 가한다면,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일본의 함대는 전혀 다른 곳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11월 26일, 일본 함대는 홋카이도 동쪽 히토카푸 만(hitokappu bay)에 집결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미군의 감시가 소홀한 곳이었습니다.  400여대의 전투기를 나눠 실은 6척의 항공모함, 2척의 전함(battleship), 2척의 중순양함(heavy cruiser)과 2척의 경순양함(light cruiser), 9척의 구축함(destroyer)을 포함한 일본 함대는 직선 거리로 약 6,000km나 떨어져 있던 진주만으로 향했습니다. 미군 정찰기, 민간 어선 등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미리 조사한 항로를 이용했습니다. 함대가 진주만에 도착하기 전에 발각된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새벽. 일본함대는 오하우 섬에서 북쪽으로  370km 떨어진 지점에 결집했습니다. 뇌격기(어뢰를 탑재해 함선을 공격하는 비행기), 급강하폭격기, 전투기로 구성된 공습부대가 두 번에 나누어 출격할 계획이었습니다. 미군은 진주만의 수심이 15~20m 정도로 매우 얕아서 함선이 어뢰공격을 받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 사실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일본은 뇌격기에 특수한 어뢰를 달아 얕은 수심에서도 함선을 공격할 수 있게 준비했습니다.

 오하우 섬 북부에는 얼마 전 설치된 레이더가 있었습니다. 레이더병들은 북쪽에서부터 시속 300km 로 다가오는 비행단을 발견합니다. 보고를 받은 미육군 항공단의 당직사관 커밋 타일러 대위는 이것이 미 본토에서 온 아군의 B-17 폭격기라 생각하고 무시했습니다. 

 일본 함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 잠수함은 공습 시기에 맞추어 어뢰를 발사해 미군의 주위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발각되어 미 구축함의 포격에 격침당했습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스번드 킴멜(Husband Edward Kimmel)은 이 보고를 받았지만, 실제 일본군 잠수함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킴멜은 루즈벨트와 갈등을 빚어 해임당한 리차드슨의 후임으로 태평양함대의 지휘관이 된 인물로, 원래 계급은 소장이었습니다만 해당 보직을 맡기 위해 대장으로 임시 진급을 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의 첫번째 공격대가 오하우 섬을 우회해 진주만에 나타나 이제는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지만, 미군은 이것이 훈련중인 해군의 비행기라 생각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7시 50분, 진주만 상공에 나타난 일본군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미군을 상대로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비행장에 폭격을 가했습니다. 대부분의 전투기들이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습니다. 겨우 이륙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기는 여섯 기에 불과했습니다. 정박해 있던 전함 중에서는 애리조나 호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의 집중 포화를 맞고 침몰한 애리조나 호에 탑승해 있던 1,511명의 승조원들 중 1,177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 해군 역사상 한 척의 배에서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온 사례는 없었습니다.  해군항공대 작전참모 로건 램지(Logan C. Ramsey) 소령은 서둘러 전문을 보냈습니다. "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a drill! (진주만 공습 당함! 훈련이 아니다!)

 뒤이어 2차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번의 공격으로 총 2,403명이 사망하고 1,178명이 다쳤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68명의 민간인도 있었습니다. 8척의 전함중 4척의 전함이 침몰했고, 나머지는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항공기 중에는 188대가 완파되었고 159대는 손상을 입었습니다. 일본의 주 표적이었던 미국의 항공모함은 당시 진주만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의 함대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와 공격했을 거라 생각했던 미군의 추측은 틀렸습니다. 덕분에 오아후섬 북쪽에 있던 일본함대는 단 한차례의 공격도 받지 않은 채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뒷 이야기

1. 레이더병의 보고를 무시한 커밋 타일러 대위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조사단은 그가 충분히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커밋 타일러 대위는 1961년 중령으로 전역한 이후 부동산 브로커로 일했고, 96세까지 살았습니다.

2.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스번드 킴멜은 해임되었으며, 다시 소장으로 강등되었습니다. 후에 그의 자손들이 킴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복권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3. 미군이 진주만 공습 중 유일하게 생포한 인물은 잠수함 승조원이었던 카즈오 사카마키 입니다. 그는 10명의 잠수함 승조원 중 혼자 살아남아 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1987년 은퇴할 때까지 도요타에서 일했습니다.



참고서적 : 제2차세계대전사 (제러드 와인버그), 전쟁 연대기 (조셉 커민스), 스탈린의 전쟁 (제프리 로버츠), 일본과 태평양 전쟁, 1945(마이클 돕스) 등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에서 참조한 내용들은 최대한 교차검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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