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도 짬이 나서 짧게라도 쓰면서
이어 나가겠습니다.
제목에 소수의 고행자들을 위한 글이라는 것은 경고성글입니다.
사실 인간의식은 힙합 스웨거처럼 특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하고 인터넷에서는 마치 이게 주된 의식인양 말하지만 진짜 지배의식은 "내가 비정상이 아니야."라는 것을 증명하는게 주된 의식입니다. 마치 메슬로우의 저ㅡ고차원 욕구 사다리처럼 특별함을 추구하려는 것은 이게 충족된 후에 세지는 순서와 같습니다.
즉
스스로가 대중 평균이며 나도 평균이야!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게 사회의 본질입니다.
사실 인간의식은 특히 전후 세대라 일컫는 세대에서 흔히 보이듯
집단성,공부편ㅡ소수의고행자들만을위한지루한글클리앙
나의 정상성 자체를 증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게 자기 제약을 크게 낳는 결과를 주죠.
저의 독자는 이런 사회 최면에서 깨어나서 인간 고유의 자아실현과 특수성에 기반한 자아실현을 위해
용감히 나아가는 사람들로 한정하며
이는 사회에서 소수에 해당합니다.
자 왜 이런 말을 서두에 했을까요? 바로 오늘 주제가
위의 내용과 관련이 깊기 때문입니다.
전 글에서 공부는 극도로 사회적일 수 있다 라는 주제를
소개했으며 이번 글에서 그것을 더 설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짧게 본론을 향해 가겠습니다.
사실 인간의 가장 밑바닥 레벨의 무의식에는
사회에서 내가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를 여부를 두려워하는
원초 두려움이 지배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글은
이를 증명하는 글이 아니기에 생략하겠으나 좀 보충을 하자면,
독자 여러분이 사실 진정으로 공부를 스스로 해본 경험이 있다면 어느 레벨에서든 이게 너무 나간거 아닌가 오버하는거 아닌가 하고 타인의 시선을 공부라는 철저히 혼자인 방안에서도 느낀 경험이 있을 겁니다.
미안하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그 독자는 타인의 의지에 대해 형식만을 갖춘 식으로 공부를 해보고 거기서 끝난 수준이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의 주체로서 의미를 세운,
진짜로 공부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행위는 자기의심을 극복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사회적 뇌의 경향과 맞닿은 것입니다..
공부는 운동보다도 더 무형의 행위인데
이는 공부를 할때는 운동에 비유하자면,
몸의 움직임에 해당하는 "인지 행위"가 보이지 않는 차원이 많기에 그렇습니다.
운동은 카메라 등으로 몸 동작을 촬영하거나 운동량 분석이 가능하지만
공부는 학습시 이런 육체 물리량이 드러나지 않죠.
이는 공부행위를 배울때 드러나지 않고 추론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며 뇌는 이 빈공간을 자기 ego의 효용성을 따지는 특성상 합리화를 위해
자기 의심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할 양이나 강도를 정할때도 사회적 뇌와 의심, 비정상성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자신이 어울리거나 지켜봐왔던 준거집단의 행위레벨이
(예로 공부를 n시간 하며 x과목은 어떻게, 어떤 수준으로 뭐를 얼마만큼 필기하고 쓰고 공부한다 등등)
유일한 참조할 절대값인데,
바른 길을 향할때는 대부분 환경적으로 준거집단의
수준은 우리가 향해야 하는 수준에 못 미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공부는 게시판에서나 소수엘리트를 욕하고 싶은 대중들의
욕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현실에서는
평균적 준거집단에 속한 인간이 갑자기 공부를
진지하게 하겠다 하면 온갖 조롱과 의심 따돌림등을
쉽게 당할 수 있는게 진짜 현실입니다.
우리의 공부 투입 인풋은
거의 대부분 이런 준거집단의 의식 레벨 관성에서 결정되며 이로인해
공부의 승패가 필터링 됩니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다는 것은 준거집단의 최면적 리듬을
따르려는 강박에 묶인 뇌를 스스로 통제한다는 것이며
이는 쉽지 않죠.
여기서 끝나지 않고
준거집단에서 탈피하는데 성공했더라도
정신의 의심과 관성은 아직도 준거 집단의 기준점에서
자신의 공부 수준이나 양 등을
눈치 보고 있습니다.
자, 민감하신 분들은 여기서 메타인지라는 말이
뇌에 맴돌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준거집단에 대한 "정상/비정상"성을 끊임없이 두려워 함을
깨부수려면 메타인지를 이용해야 합니다.
즉 이런 작용이 일어날 때 "내가 준거집단의 기준이 묶여있는 작용에서 두려워하는 거구나" 하고 자각하고
바른 방향으로 자신의 길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길은 저런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자신의 참된 너머의 경계를 위해 앞을 향해 정진하게 합니다.
사실 위의 영역을 좀 더 깊게 들어가서 제일 중요한 사회성 뇌가 작용하는 것을 논하며 마치겠습니다.
모든 행위는 자기 의심을 넘어서야 하는데
공부라는 주제에서 가장 유규한 논쟁은 "공부 하는 이는 정해져 있다" 라는 말입니다.
모든 (진짜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위의 말에 담긴 언어 최면과 원초 두려움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이며
이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공부는 극도로 사회적이라는 말을 제가 표현 어구로 반복한 이유는 ...
바로 위의 말을 염두해 두고 강조를 위해 한 것입니다.
"공부는 하는 놈이 정해져 있다/ 공부라는 것은 능력이 정해져 있다"
운명론 적 세계관에서 나온 이 말은 오늘 여기서 논하지 않습니다.
단지 오늘은 여기에 대해 오늘의 주제와 연관된 사회성 의식과 현상/ 조건만을 강조하며 끝냅니다.
공부를 할때는, 바른 공부 마인드 조건들이 갖춰진 의식자의 의식 안에서는
위의 저 운명론 시각의 말에 대해서 반박할 수 있어야 할겁니다. 이는 물론 쉬운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어려울겁니다.
즉 어려운 경우는 불교에서 마치 "선근"이라고 바른 정견을 가진 조건들이 카르마 상에서 쌓아진 업이 없을 때는 더 정진해서 조건들을 구비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태일 거구요.
이 경우
자기 스스로가 저 말이 왜 나의 경우에 틀린 지 스스로 싳천을 통해 발견한 의미가 이미 있어야 저 말에 최면당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저 말이 두려울 수록 구체적인 행위와 의도를 반복해야 할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 말은 우리가 성취의 흐름 입구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우리를 괴롭힐 것이며,
이로 인해 공부의 흐름에 들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저런 사람들과 논쟁에 빠지는 의식 흐름의 충동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즉 공부가 정말로 잘 되기 시작하기 전엔
저 말을 하며 내 행위가 어차피 망할 거다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과 논하고 반박하고 싶은 것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때
진지하게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1. 자신을 저 논쟁에 휘말리게 하는 충동제어,
2. 혹은 나의 행위를 안된다고 하는 그들에 대해서
조롱이나 반박
3. 혹은 나의 공부행위가 왜 맞는가를 일반인들에게 설득/합리화 하려는 모든
사회적 욕구들이 사실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 모든 것을 공부로 집중해서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이 충동들은 지극히 사회적이며 원초적입니다.
공부의 바른 흐름에 들었다는 것은 위의 세가지 충동등에 모두 빠지지 않고
바른 의도와 자각으로 저 원초 충동에 대해서 바르게 보호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뇌와 충동이 관여하는 것은 다른 양상도 많이 있지만 이제 여기까지만 서술하며 글을 마쳐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